1편에서 손해배상 청구의 네 가지 관문(위법성·손해·인과관계·고의과실)을 다뤘는데요, 오늘은 그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불법행위”라는 개념 자체를 좀 더 깊이 파헤쳐 보겠습니다.
왜 우리 법은 “고의 또는 과실”만 있으면 책임을 지우는지, 그리고 본인이 직접 안 했는데도 책임지는 경우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정리해 드립니다.
1. 왜 “고의 또는 과실”이 있어야 책임을 지는가 – 과실책임주의
1편에서 민법 제750조를 소개해드렸는데, 이 조문의 핵심 철학은 “과실책임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는 손해를 유발한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 책임을 지우는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 고의나 과실이라는 ‘비난받을 만한 요소’가 있을 때만 배상 의무를 지우는 원칙입니다.
왜 이런 원칙을 택했을까요? 만약 아주 조심스럽게 행동했는데도 우연히 손해가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책임을 진다면, 누구도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없게 됩니다.
과실책임주의는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면서도, 부주의한 행위에는 응당한 책임을 지우는 균형점입니다.
즉 “조심했다면 책임 없고, 조심하지 않았다면 책임 있다”는 것이 이 원칙의 핵심입니다.
2. 고의와 과실, 정확히 뭐가 다른가
- 고의 : 자신의 행위로 타인에게 손해가 생긴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일부러” 한 경우입니다.
- 과실 : 마땅히 기울여야 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손해를 예견하지 못하거나 방지하지 못한 것입니다. “부주의로” 그렇게 된 경우입니다.
실무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민법상 손해배상 책임에서는 고의와 과실을 굳이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형사처벌에서는 고의범과 과실범의 처벌 수위가 크게 다르지만, 민사 손해배상에서는 고의든 과실이든 일단 인정되면 원칙적으로 손해 전부를 배상해야 합니다.
(다만 위자료 산정 시에는 고의성의 정도가 금액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3. 책임능력이 없으면 어떻게 되나 – 미성년자와 심신상실자
여기서 중요한 예외가 있습니다.
아무리 위법행위를 했더라도, 자기 행위의 책임을 변별할 지능(책임능력)이 없는 사람은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 미성년자 : 민법 제753조에 따라,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미성년자가 그 행위의 책임을 변식할 지능이 없다면 배상 책임이 없습니다.
- 심신상실자 : 제754조에 따라, 심신상실 중에 손해를 가한 사람도 원칙적으로 책임이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고의나 과실로 심신상실 상태를 초래했다면 이 예외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경우 피해자는 배상을 못 받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제755조는 이런 책임무능력자를 감독할 법정의무가 있는 사람(부모, 후견인, 학교 담임교사 등)이 대신 배상 책임을 지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감독자가 “감독의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면 책임을 면할 수 있습니다.
4. 남이 한 일인데 내가 책임지는 경우 – 사용자책임
여기서 실무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을 소개해 드립니다.
민법 제756조는 피용자(직원)가 업무 중 저지른 불법행위에 대해, 그를 고용한 사용자(회사·사업주)도 함께 배상책임을 지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사무집행에 관하여”라는 표현이 핵심인데, 판례는 이를 “피용자의 직무집행행위 자체는 아니더라도, 그 행위의 외형만 보면 마치 직무 범위 내의 행위처럼 보이는 경우까지 포함”한다고 넓게 해석합니다.
즉 직원이 개인적인 목적으로 한 행동이라도, 겉보기에 업무의 연장선처럼 보인다면 회사가 책임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예외가 있습니다.
피해자 자신이 그 행위가 직무 범위 밖이라는 것을 알았거나, 중대한 과실로 알지 못했다면 사용자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중대한 과실’이란,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다면 알 수 있었는데도 만연히 직무 범위 내의 행위라고 믿어버린, 거의 고의에 가까운 부주의를 말합니다.
실무에서 중요한 이유 : 배달 기사가 배달 중 사고를 냈다면, 단순히 그 기사 개인만이 아니라 배달업체(사용자)에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실제로 배상받을 자력이 있는 상대방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피해자에게 매우 중요한 조항입니다.
5. 건물이나 시설 때문에 다쳤다면 – 공작물책임
또 하나 알아두실 개념은 제758조의 공작물 책임입니다.
건물, 시설물, 구조물처럼 사람이 설치한 ‘공작물’의 설치나 보존에 하자가 있어 손해가 발생하면, 그 점유자·소유자가 배상책임을 집니다.
여기서 ‘하자’란, 공작물이 통상 갖춰야 할 안전성을 갖추지 못한 상태를 의미하며, 위험성에 비례해 사회통념상 요구되는 방호조치를 다했는지가 판단 기준이 됩니다.
다만 이 하자의 존재는 피해자 측에서 증명해야 합니다.
6. 실무에서 보는 사례
상담을 하다 보면 “가해자 개인은 돈이 없어서 배상받을 방법이 없다”고 낙담하시는 분들을 자주 만납니다.
하지만 그 가해자가 회사 업무 중이었거나, 미성년자였거나, 특정 시설의 하자로 인한 사고였다면, 오늘 다룬 제755조(감독자책임), 제756조(사용자책임), 제758조(공작물책임) 중 하나를 근거로 자력이 있는 다른 상대방(부모, 회사, 건물주 등)에게도 함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고를 당하셨다면 가해자 개인만 볼 것이 아니라, “이 사고와 관련된 다른 책임 주체가 있는지”를 함께 검토해보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7. 자주 묻는 질문
Q. 여러 사람이 함께 손해를 끼쳤다면 어떻게 되나요?
공동불법행위에 해당하며, 가해자들은 원칙적으로 연대해서 손해 전부를 배상할 책임을 집니다. 피해자는 그중 자력이 있는 한 명에게 전액을 청구할 수도 있습니다.
Q. 회사가 사용자책임을 지면, 그 직원은 책임이 없어지나요?
아닙니다. 사용자책임은 피용자 본인의 책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는 것입니다. 다만 회사가 먼저 배상했다면, 회사는 이후 그 직원에게 구상권(대신 낸 돈을 돌려받을 권리)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Q. 미성년자 부모가 감독의무를 다했다고 주장하면 배상을 못 받나요?
감독의무를 다했다는 사실은 부모 측이 증명해야 하는데, 실무상 이를 인정받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따라 결론이 달라집니다.
※ 이 글은 관련 법령과 판례를 바탕으로 한 일반 정보이며, 개별 사안의 사실관계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으니 자세한 사항은 법률전문가와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편에서는 계약상 책임과 불법행위 책임이 어떻게 다른지, 실무에서 자주 헷갈리는 부분을 다뤄보겠습니다.